할머니는 어린 손녀를 데리고 마당에서 꽃을 가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손녀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할머니, 언제 죽을 거예요?” 할머니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그건 왜 물어?” “응, 할머니 죽으면 (마당에 함박 피어 있는 흰 꽃을 가리키며) 이 꽃 할머니 주려고요” “죽은 사람에게 꽃 주는 것 어떻게 알았어?”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 봤어요” 아마도 지난 일주일 동안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는 뉴스가 연일 방송을 통해 나오는 것을 어린 손녀가 보고 하는 말일 것이란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유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애도를 표 하는 반면에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조차 기자들의 카메라를 의식해 손가락으로 V자를 하며 포즈를 취하는 철 없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이렇듯 전직 대통령의 자살로 인한 사망소식은 모든 국민들에게 각인되리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고인이 남긴 유서의 내용과 배경을 방송사에서 상세히 반복해서 보도하는 가운데 유서내용의 일부는 불교 사찰에서 어느 스님과의 나눈 대화내용이었다는 것이며 특히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말은 불교의 윤회설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결국 “인생무상”이요 “삶의 회의” 즉 “허무”가 아니겠는가? 성경 전도서에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솔로몬에 의해 “인생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되고 헛되도다 “ 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리 다르지 않은 견해를 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이 결론이거나 끝이 아님은 물론 죽음으로서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은 더 더욱 아니며 누구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바로 이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야 할 사명과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을진대 작금의 한심한 세태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마저 중심을 잃고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편승해 함께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넘어 의분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그리고 삶과 죽음은 물론 구원과 심판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된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웃이 있을 수 있겠으나 어떻게 보면 자신을 비롯 누구나 가끔씩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세상사람과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이 있다면 목적지가 다르기에 대처방법 또한 다른 것이다. 이것이 곧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길이요 산 소망의 삶이라 하겠다. 조금 엉뚱한지는 몰라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마귀도 분명 전공 분야가 있다는 생각 말이다. 지금 한국은 저 출산율과 자살률에 있어 세계1위란다. 둘 다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경시사상과 풍토라 하겠다. 아니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 주권에 도전하는 매우 심각한 행위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에는 생명을 경시 여기게 만드는 전공분야의 마귀가 자살을 부추기며 극성스럽게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다고 진단해 본다. 그런가 하면 이곳 뉴욕교계는 심심할 까봐 한번씩 터뜨려주듯 불거져 나오는 불미스러운 소식이 있다. 특히 목사들을 대상으로 한 고소, 고발 사건이다.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 기사화되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교회와 목사의 권위는 땅에 추락하는 것이다.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도자 목사를 넘어지게 하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뉴욕교계에는 주의 종을 잡는 전공의 마귀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진단도 가능하다. 건강을 예방하기 위해 바른 진단은 필수적이듯이 지금 세계를 비롯 조국과 민족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을 바르게 진단하여야 할 때다. 세상이 제시하는 다양한 기준의 청진기로는 이미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와 뜻 그리고 섭리가 기준이 되는 말씀만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청진기가 될 수 있다. 사람이 이 땅에 어떻게 태어났느냐와 살았는가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어떻게 죽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설득력을 더 한다. 어린 손녀와 죽음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할머니의 반응이 궁굼해진다. 손녀가 할머니의 영정에 조화로 쓰겠다던 그 꽃을 바라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실까? 혹시 "확" 뽑아버리진 않으셨겠죠?
0 Comments
Leave a Reply. |
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8월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