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어린 딸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한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조카가 무슨 큰 일을 보고하듯 “삼촌, 한국에서 우리 은별이가……”하며 입을 여는 것이다.
하루는 은별이가 공원에서 많은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갑자기 친구들에게 미국에서 흔히 하는 인사법에 따라 “My name is Sharon and I come from America”라고 영어로 말해 민망히 여긴 엄마가 다급히 “응! 이 아이의 이름은 은별이고 멀리 미국에서 왔단다”라고 통역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한 남자아이가 “나는 중국에서 왔다”고 하길래 모두들 아마 중국에서 온 조선족 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이어서 “우리 집에는 자장면도 있고 짬뽕도 있는데 배달도 한다”며 “무엇으로 주문하겠느냐?”라고 하길래 한바탕 뒤집어지게 웃었단다. 중국집(식당)을 운영하는 집안의 아이였던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어린아이들이지만 의도적이거나 정확성의 여부를 떠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사례라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 호주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고민하는 이민2세 자매와 멘토링(Mentoring)을 통해 들은 이야기의 내용이다. 백호주의 그늘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그 자매는 어려서부터 철저히 백인친구와 어울리며 자신도 백인으로 살아가리라고 결심을 하며 의도적으로 한인사회를 멀리하고 청소년기와 성장기를 보냈다고 한다.(겉으로는 언어나 외모에 있어 백인들에게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백인친구들이 자신을 백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 역시 백인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결국 그 동안 혼란 속에 잃고 살았던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백호주의 문화와 사회의 영향하에서 감수해야할 불 이익도 마다하지 않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깊이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한인사회와 한인교회에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뿐 아니라 미스 호주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참가해 한국에 대한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고백과 함께 언제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결혼식에 꼭 주례를 해달라는 부탁도 아울러 잊지 않고 했다. 그리고 정말 몇 년 후에 이미 호주를 떠나 뉴욕에 있는 나에게 그 때 약속을 상기시키며 로스엔젤레스(LA)에서 결혼식이 있으니 주례를 부탁 드린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약속도 있고 하니 알았다”고 쉽게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신랑 역시 한국문화권 밖에서 성장한 이민 2세 청년으로 대화조차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부모님의 주변환경도 거의 미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있어 결혼식장에는 거의 미국인이거나 한국인 2세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권 목사를 알아보라고 했으나 단호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시댁에서 허락을 하더냐고 했더니 다른 것은 다 양보할 테니 주례자만큼은 내게 결정권을 달라고 하고 나를 이미 소개 드려 허락을 받았단다. 도리어 이러한 기회를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시댁에도 심어주고 싶다는 기특하리만큼 사려 깊은 그녀의 생각과 판단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고 결국 이것이 나의 결혼 주례에 데뷔하는 첫 번째 성공적인 무대가 되었다. 이제 정체성에 관한 감동적인 글을 소개하려고 한다. 진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의 최고의 꿈은 무엇일까? 왕궁의 식탁이나 부잣집의 장식장에서 우아한 삶을 원할 것이다. 질그릇의 토기장이는 한 나라의 최고 장인이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그릇들은 거의 모두가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어느 날, 토기장이는 진흙인 내 앞에서 나를 반죽 한 그릇을 반죽하기 시작했다. 나는 흥분되었다. 나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토기장이는 예전에 빚었던 그릇들과는 다른 촌스러운 그릇으로 빚고 있었다. 양쪽으로 당나귀 귀같이 넓은 손잡이가 있는 그릇이었다. 주변의 다른 진흙들은 나의 그 모습을 보면서 비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잘난체하더니 잘됐다며…… 나는 순간 망측한 모습으로 빚어놓은 토기장이가 원망스러웠다. 토기장이는 내가 완성되자마자 나를 가슴에 안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곳은 어느 한적한 시골의 가난한 농부 집이었다. 나의 꿈은 다른 질그릇과 같이 왕궁이나 부잣집에 우아한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저토록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의 집으로 가게 되다니, 차라리 나는 바닥에 떨어져서 깨져 없어졌으면 하고 바랬다. 그런데 집안에서 나온 농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랬다. 농부의 두 팔에는 손이 없었다. 그 농부는 농사를 짓다 두 손을 잘린 장애인이라 보통의 그릇은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토기장이가 그를 위해 손이 아닌 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한 것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농부는 나를 붙들고 소리 없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때 토기장이는 그에게 “내가 질그릇을 만들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은 처음이오. 이 그릇은 나의 최고의 작품이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토기장이가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를 빚은 토기장이에게 감사를 했다. 행복은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 있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그 자리를 확고히 지키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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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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