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 중에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자매가 있다.
그 자매가 찍힌 사진을 보면 남들과 다른 특징과 공통점이 있다. 두 다리 모두 날으는 새처럼 공중에 떠 있거나(공중부양 아님) 한 다리가 반드시 들려있다. 궁금해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본능인가봐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댄서본능” “직업본능”이라는 말이다. 무용도 항상 발이 얌전하게(?) 땅에 밀착되어 있는 고전이 아니라 땅에 붙어 있을 새가 없는 과격한(?) 현대무용이기 때문이랄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본능”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도움말이 나왔다. “어떤 생물 조직체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작이나 운동. 가령 아기가 젖을 빤다든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행동 따위의 생물학적 본능과 어떤 생물체가 태어난 후에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과 같은 심리학적 본능이 있다” 귀소 본능 (the homing instinct) 모성 본능 (a maternal instinct) 생존 본능 (an instinct for survival) 창조적 본능 (a creative instinct) 자기 보존 본능 (the instinct of self-preservation) 이 있으며 영화 제목처럼 원초적 본능 (a basic instinct)도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 해 주었다. 본능에 대해 더 찾아보니 다른 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생득적(生得的)으로 타고난 생리적 충동과 원시적 욕구를 지체없이 즉각적으로 만족시키려는 성격구조의 한 단위. 본능은 쾌락을 추구하며 모든 본능의 과정은 무의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성경적 해석에 가깝다고나 할까?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쾌락(죄)을 추구하는 “죄인본능”을 안타깝게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동물들)과 구별시켜주는 본질적 특성으로 진위(眞僞), 선악(善惡)을 식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理性reason)을 가지고 있다. 교육이나 경험을 통해 이성의 판단능력은 성숙될 수 있다. 따라서 일방통행과 독주식 죄의 본능을 어느 정도 조절해 주는 기능으로서의 이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불같이 타오르는 죄의 본능을 다스리기가 불가능하다. 많은 믿음 의 영웅들 조차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는가? 성군 다윗도 나실인 사사 삼손도 영화처럼 원초적 본능 (a basic instinct)에 무너졌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물질본능 까닭에 애굽으로 내려갔고 또 거기서 생존본능이란 덫에 걸려 심지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저질러 망신살을 뻗치게 된다.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찾아가 유혹하는 마귀의 세 가지 시험전략도 바로 이러한 본능의 약점을 이용하려 했다는 점이다. 아담의 범죄함 이후 사람은 이중적 구조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 간다. 인간답게(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회복) 살아가려는 생각, 이것은 신령한 본능의 현상이며 반대로 끝임없이 쾌락으로 달려가는 본능, 이것은 타락한 육신의 본능이다.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의의 본능)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죄의 본능)은 행하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처럼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라고 힘차게 환희에 찬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이 그가 위대한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정적인 면에서의 약점이요 단점인 “죄인본능”을 다스리는 방법은 물론 긍정적인 면에서의 강점이자 장점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인본능”을 부각시키는 방법 또한 오직 말씀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 뿐이다. 과연 나는 예수(복음)로 말미암아 거듭 난 목사본능, 집사본능, 성도본능으로서 거룩하고 복되게 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가식과 가면으로 위장한 채 도둑본능, 사기꾼 본능, 탕자본능과 같은 “죄인본능”에 온 몸을 맡긴 채 악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람은 세상 물질문명과 타협하지 않음은 물론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하루에 세번 씩 평소 습관대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던 다니엘과 불 속에라도 들어 가는 것을 결단코 주저하지 않고 믿음의 절개를 지켜 의인본능에 충실하게 살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님 조차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며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통해 십자가를 지실 수 있으셨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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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8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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