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한 청년이 사무실에 불쑥 들어와 “목사님! 이제부터 목사님을 부모님이라 생각하며 교회생활 하겠습니다.혹 잘못한 일이 있으면 야단쳐 주세요.”
혹 객관적으로 목사가 상당히 감동이었을 거란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으나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청년들을 상대로 목회를 해온지라 자주는 아니더라도 꽤 그런 소리를 들어 왔었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고나 해야할까. 어째든 지금까지 그 청년을 한 번도 야단을 쳐 본일이 없다. 그렇다면 야단 맞을 이유가 없을만큼 완벽한 교인이어서 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말한 당사자가 아직 초신자이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말한 것 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할 뿐 야단이고 책망을 왈가왈부 할 때는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잘못에 대한 야단(책망)이라는 체벌적용에 있어 적정 수준 안에서 해야 하기에 적당한 수위 조절이 필요한대 이것이 보통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잘못된 사례와 경우를 통해 많은 어려움을 피차 겪어 본 바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의 경험을 비추어 생각해 볼때 특히 야단을 치는 입장에서 특정인을 야단 칠 때는 언제였으며 또 무엇 때문이었을까를 되 짚어보았다. 역시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경우도 그렇지만 야단을 듣고 받아도 소화 할 수 있는 성장되고 성숙한 교인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친숙하고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한 원인일 때도 있었다. 물론 이것이 오판의 결과로 나타나 어려움을 겪게 된 원인제공이 되기도 했지만…… 아무튼 개인적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또 생각해 보니 항상 야단 맞는 사람이 계속 야단을 맞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그 이유도 간단했다. 항상 앞장서서 일 하는 헌신자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결국 일, 사역이라는 공동의 관심사를 진행하는 관계속에 나타나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관계와 관심이 없다면 야단도 책망도 치거나 받을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때로는 심한 책망을 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들의 무능력과 무기력에 대한 책망 그 이상의 한탄을 격정적으로 쏟아 내시는 수위가 높은 책망이셨다. 듣기에 따라 “더 이상 못 참겠으니 다 떠나거라. 믿음이 있는 제자들을 모아 다시 새로 시작하는 게 낫겠다” 하는 의미 부여가 꼭 무리 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한 표 던지고 싶다. 야단치기에도 기술이 필요하단다. 실제로 야단을 칠 때 감정이 앞서면 야단치기는 일방적인 잔소리가 되기 쉽고, 야단을 맞고 나면 감정이 상하기 때문이라는 심리 또는 상담 전문가의 분석이 있어 여기저기 참고 삼아 살펴 보았다. 바로 내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위에서 나는 말만 하면 야단을 치는 것 같단다. 그러면 사모가 급해서 이렇게 애둘러 변명한다. “목사님 가정이 이북 출신이시라 억양이 강해서 그래요” 비난의 화살을 한 순간 피한다고 하지만 난 그냥, 속수무책으로 졸지에 살아 보지도 구경도 못한 북한동무가 되어야만 했다. 참 억울할 때도 약 오를 때도 많았다. 하루는 집에서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주일 설교 동영상을 보며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나의 등뒤에서 아내는 이렇게 말을 던진다. “강단에서 설교할 때가 가장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네요. 그냥 강단에서 사셔야 겠어요” 느닷없는 기습에 세모 눈이 되어 째려보는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서는 아내의 등을 향해 나도 공격적으로 말 화살을 날렸다. “고따구로 해봐!”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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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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