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않은 일을 오래동안 기억하거나 앙금을 가지고있는 감정이나 상태를 뒷끝이라고 한다.
따라서 뒤끝이 있다, 없다. 뒤끝이 좋다, 나쁘다라고 흔히들 표현한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신종어 또는 유행어들이 범람하고 있는데 그 중에 “폭풍XX” 과 “XX종결자”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얼마 전 나는 폭풍충격에 가까운 말을 들었다. 모 교인이 교회를 나오니 안 나오니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신앙생활을 어떻게 그렇게 하나, 도대체 믿음은 있는거야 없는거야?” 하며 교인에 대한 실망감에 조금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부흥과 성장에 예민해 있던터라 그 말은 내게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태도(성질)를 못 마땅히 여겼는지 곧바로 돌아오는 말은 거의 나를 실신시킬만큼 큰 충격, 바로 폭풍충격이었다. “목사봐서는 교회 남아 있을 교인 한 사람도 없거든요” 이 정도되면 부채질까지 해대는 상황이기에 성질 한 옥타브 더 올려야 할 입장이었지만 왠지 아무 말도 표현도 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 말은 내게 “당신을 성질 종결자로 인정합니다” 라고 일침을 놓는 듯 들려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다. 잠시 후 곰곰히 그 말을 되새김질하며 교회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교회가 만일 목회자를 비롯 사람을 보거나 의식하고 출석을 하며 봉사를 하는 공동체라면 개인은 물론 교회마저도 언제든지 흔들리거나 무너 질 위험성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출발부터 목적까지 잘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님만 보고 의식하며 헌신하는 공통체여야 건강한 복음적 교회요 성도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목사가 잘 나서 교인들이 모였다고 한 순간이라도 착각했거나 또는 혹시라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비쳐졌을 경우를 생각하니 민망하고 부끄러움에 더욱 얼굴이 뜨끈 뜨끈 열이 달아 올랐다. 결국 그 말은 나를 불쾌하게 만든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억지스러운 유쾌감을 조성하는 편안한 거짓과 위선보다는 훨씬 자유로울 수 있어 차라리 마음이 후련 하다. 그렇다면 나는 뒤끝이 없느냐? 꼭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왠지 이런 생각이 슬그머니 드는 것을 감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도 항상 좋은 것만은 아냐, 때론 교인들 보면 목회 회의감이 들거든” 이라고 항변성 뒤끝을 하소연하듯 내 뱉어 보지만 뒤끝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뒤끝없는 목사가 되면 좋겠다. 성경에 뒤끝이 없이 쿨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요셉이다. 형들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과 같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동생 요셉을 만났을 때 그들은 요셉의 남아있을 앙금의 뒤끝을 매우 두려워 한다. 하지만 통이 큰 요셉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섭리론으로 뒤끝을 쿨하게 종결한다. 반면에 뒤끝이 더티한 인물도 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각사람 하만이란 고약한 인물이다. 모르드게가 자신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르드게는 물론 그의 민족 유대인 모두를 말살하려했던 그의 뒤끝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굴욕 뒤끝의 종결자라 하겠다. 그러나 항상 궁금한 것은 예수님의 경우이다. 우리 신앙의 영원한 대상이요 모범이시며 표준과 기준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여행에 내어 보내시며 하시는 말씀 가운데(눅9: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라는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예수님도 뒤끝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조롱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을 위해 십자가상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사랑으로 뒤끝을 승화 시키신 종결자임을 알 수있다. “당신은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뒤끝 종결자이십니다”
0 Comments
Leave a Reply. |
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8월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