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생들에게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게 뭐야?’라는 질문을 한다거나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에게는 ‘사랑이 뭐냐?’하는 질문이 생겨나기도 하며 고뇌하는 철학자들은 ‘죽음이 뭐냐?’ 혹은 ‘인생이 뭐냐?’하는 질문으로 고민한다. 생활고에 지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돈이 뭐냐?’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공주 포기하고 내 여자로 살면 안되겠니?” “대답 안 할거야, 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하는 지를 아는데 어떻게 대답해, 대답하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 질 것을 아는데 어떻게 대답해, 죽어도 대답 안 할거야” “그래 맞아, 아주 나쁜 질문이었고 아주 좋은 대답이었어” “마이 프린세스”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대사이다. 감동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열정이 담긴 직설적 고백의 질문과 상대방을 배려한 반어적 긍정의 대답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 하였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화는 언제들어도 가슴을 뭉쿨하게 만드는가 보다. 마이클 마쿼트의 ‘리더십 에센스’에 나오는 글이다. “위대한 질문은 이타적이다. 질문자가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 뽐내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위대한 질문은 대개 상대방에게 유익하고 지혜로우며 대답하기도 힘들다.또 겸손하고 나눔의 정신을 토대로 한다. 엄청난 고민과 배움으로 이어지는 질문이 바로 위대한 질문이다.” 이 글을 보니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했던 부자청년이 생각난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제법 그럴 듯 한 좋은 질문처럼 보인다. 계속해서 청년은 ”계명도 다 지켰다”고 한다. 율법을 표면적으로 지킨 자신을 의인이라고 확신한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영생을 논할 이유가 있었을까? 어째든 예수님은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라고 청천벽력 같은 좋은 대답을 하셨다. 즉 계명의 근본정신은 “네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며 또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자기 의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훈 하시기 위해서였다. 결국 청년은 부자였으므로 크게 근심하였고 예수님을 떠났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위한 불순한 의도를 숨긴채 던진 어리석은 질문과 어리석은 답변으로 망신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다.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생각과 관점, 의식과 사고방식과 태도 등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틀리거나 착각할 수 있음을 알고 자신에 대한 불신과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적극적인 열린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고집을 확신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겸손히 계속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가?” 를 끊임없이 진단하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외식하는 위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사례를 더 생각해 보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 질문의 의도는“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들의 악한 꾀가 성사되지 못하도록, 음행한 여인을 무리 가운데 세웠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무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람을 죽이려는 나쁜 질문에 사람을 살리는 좋은 대답이었다 누구나 주변에서 흔히 경험했을 터인데, 옛날부터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던지는 나쁜 질문이 하나 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아이들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괴로운 표정을 짖는 것을 보고 어른들은 즐거워 한다. 그러다 “아빠,엄마 둘 다 좋아요” 라고 순진한 아이들의 좋은대답이 나오면 계속해서 집요하고 심술굳게 이렇게 억압하며 강요해서 되 묻는다. “안돼,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 한가지만 골라야 돼”라고 말이다. 참, 이런 어른들 싫다. 아득한 옛 추억으로 떠오르는 어린시절 아버지께서 생일날이 되면 물으셨던 “짜장면이 좋아? 짬뽕이 좋아?”라는 질문이 나를 즐겁게 했다. 물론 둘 다 먹고 싶은 마음에 고민이되었던 질문이기도 했지만 이 질문을 듣기 위해서는 1년을 참고 들뜬 마음으로 기다려야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질문이되었기에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 지며 그리워 진다. 지금은 아들 생일 날이 되면 이렇게 묻곤 한다. “갈비가 좋아? 피자가 좋아?” 한편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은 현실적으로 사랑을 주고 받아 드릴 수 없다는 “나쁜 질문 좋은 대답”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전달한다. “지금 이 말 잊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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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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