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에 헌신을 새신으로 바꿔 신고 너무 좋아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으시대던 일, 한참 뛰어 놀다 똥밟은 새신을 보며 충격을 받아 속상했던 일, 심지어 잘 때도 옆 자리에 고이 포개놓고 잠들었던 일들이 있었다.
그 만큼 새신을 소유하는 것은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하루는 둘째아들이 새신을 사야한다고 하기에 새신을 신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헌신짝 버리 듯하고 새신을 또 사달라고 하는냐며 야단을 쳤다. 그러나 아들은 신발이 낡아서가 아니라 작아서 신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참 성장기에 있는 둘째 아들이 키가 부쩍 컸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이처럼 새 신발로 바꿔 신을 때이다. 요즘 신발이야 워낙 제품이 좋아 낡고 닳아서 새신으로 바꿔 신는 것은 아니다. 유행에 민감하고 또 새로운 제품에 대한 욕심이 멀쩡한 신발도 헌신 짝처럼 버리고 새 신으로 갈아 신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장과정에서 크기가 맞지 않아 바꿔 신어야 하는 것이야 어찌 하겠는가. 자녀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빠르게 변화하듯 어느 덧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또 새해가 성큼 닥아왔다. 늘 이 맘때면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시간들을 준비한다. 목회자로서 교회 안과 밖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특히 신년 목회계획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계획들을 함께 이루어 나갈 일꾼으로서의 직분자들을 세우기 위해 심사숙고하게 된다. 새로운 직분자들을 세운다는 흥분(?)보다는 고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 해에 세웠던 직분자들의 헌신도와 충성도를 꼼꼼히 냉철하게 따져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이미 직분을 헌신 짝처럼 팽개치고 자리를 떠난 사람도 있을 뿐 아니라 일부는 새신을 신었다는 감격과 감동은 신년 초에 잠시 반짝했을 뿐 그 후로 직분이라는 신을 신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하면 신발이 벗어 질세라 끈을 바짝 묶고 한결같이 지금까지 달려 온 일꾼도 있다. 보통 교회에 처음 출석하고 등록한 교인을 새신자라고 한다. 그러면 기존에 이미 오래 전부터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은 무엇이라고 할까? 별로 어려운 답은 아닌 것 같다. 새신의 반대말이 헌신이듯 새신자의 반대말로서 헌신자가 아닐까? 오래 되었다고 무조건 나쁘다거나 새 것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공식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오래 되었기에 익숙하고 친숙하여 좋을 수 있는 반면에 도리어 새 것이기에 미숙하고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 된 교인을 의미하는 헌신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앞에 헌신(獻身) 하는 헌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오래 교회를 출석하고 여러 다양한 직분과 높은(?)직책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을 하나님앞에 온전히 드리는 헌신이 없다면 항상 새교인을 벗어 날 수 없으며 비록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의 기간이 짧고 직분의 위치가 낮아 보여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헌신하고 있다면 분명 헌신자임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헌신자인가? 새신자인가? 어렸을 때 부른 새신이란 동요의 노랫 말이다.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새신을 신고 달려보자 휙휙 단숨에 높은산도 넘겠네” 유년시절 새신을 신었을 때의 흥분과 감격을 되 새기며 새해 새 직분이라는 새로운 사명의 새신을 신고 하늘까지 뛰어보자, 그리고 높은 산도 넘을 수 있게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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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8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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