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시대만 해도 여자들이 빨랫감을 마당 수돗가나 우물가 또는 시냇가에 들고나와서 방망이로 “퍽퍽퍽”하는 소리가 나도록 막 두들겨 대며 빨래를 하셨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세탁세제를 이용해 빨래를 할 수 없었기에 방망이로 마구 빨래감을 두들김으로써 찌든 때를 뺐다. 물에 헹구어가면서 방망이를 쉴새 없이 두들겨야 옷속에있는 때를 뺄수 있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지식이다. 좀더 전문적 지식을 얻기위해 방망이 빨래법에 대해 알아 보았다. 빨래방망이로 빨래감을 두들기게 되면 타격받는 부분과 그 밑 부분 그리고 제일 아래부분과 맞닿은 부분의 압력이 높아지게 된다고 한다. 이 압력에 의해서 때를 밀어내게 되는 방식이 빨래 방망이로 두들기는 빨래법이다. 빨래방망이로 열심히 두드리다보면 옷감은 심한 압력과 진동을 받게 되고 그 진동으로 인해 열이 발생하고 옷감에서의 분자활동은 빨라지게 된다. 그로 인해 옷감에 묻은 때의 분자활동도 활발해져 물에 쉽게 용해되어 때가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단지 힘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이렇게 두들겨 때를 벗긴 빨래감들을 모아 양지바른 햇살에 툭툭 털어 말린 후 대청 마루나 방으로 빨래감을 가지고 들어와 재래식 다림질인 다듬이를 중심으로 두 여인이 마주 앉아 역시 준비된 방망이를 양손에 잡고 한치의 주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따다닥 따다닥” 현란하고 심오하기까지 한 손 놀림에 의해 박자와 호흡을 맞춰가며 신명나게 방망이를 두들겨 대다가 입에 한 모금 물을 들이키며 잠시 숨을 고르는 가 싶더니 갑자기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에 의해 잔뜩 얻어맞아 지쳐있던 빨랫감이 다시 생기를 찾는다. 그러면 다시 다듬이질에 고수이신 여인들은 쉴새없이 장단에 맞춰 방망이를 내리치기를 반복한다. 이날은 더러운 묵은 때와 구겨진 주름으로 흡사 걸래감같던 빨래감들이 새 새명을 얻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빨래법에 대해 색다른 이론이 있다. 즉 스트레스해소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유교주의사회라서 여자들의 한이 많이 맺혀있고 따라서 스트레스가 말할 수 없을정도로 많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들어도 못들은 척 귀 먹어리 생활, 봐도 못 본척 소경생활, 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벙어리 생활로 항상 행동에 조심해야 만 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마땅히 풀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망이를 마구 두들김으로써 빨래를 할뿐 만아니라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효과가 되었단다. 물론 본 목적은 빨래의 때를 빼고 주름을 펴기 위함이지만 부차적인 목적으로 스트래스 해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린시절 간접적으로 겪었던 작은 경험들이 이제는 더 이상 맛 볼수 없는 재래식 추억이 되고 말았다. 때로는 문명의 이기로 얻은 현대적, 과학적 도구와 방법들이 몸을 편하게 그리고 일을 빠르게 할 수는 있지만 이런 정감을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도 있어 편하고 빠른 것이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름다운 고전이나 전통을 계승하고 유지하며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리란 생각이 든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아마도 우리의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소위 현대 예배를 열린 예배라는 말로 정의하며 또 교회마다 붐처럼 일어났던 예배의 형태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교회의 예배형태인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언제 부턴가 예배에 대한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고 나면서부터 평생을 예배와 함께 동거동락한 예배 전문가라고 자부(?) 할 수 있는 나로서는 여간 고민이 되는 힘든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입으로 늘 강조하고 가르친 예배모범을 통해 눈과 귀에 익숙할대로 익숙하고 몸에 뵐대로 뵌 예배이기에 더욱 그렇다. 더 이상 무엇을 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두렵기까지하다. 탁상공론일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셨던 주님의 사역처럼 표현되어지고 증거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러움에 몸과 맘을 움츠리게 만든다. 주일예배 후 예배 사역자들과의 모임에서 뜻 밖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예배의 순서에 순서자들을 정하여 참여의식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어떻게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전통적 예배의 형태인 것이다. 과거로의 무조건적인 회기라기보다 신앙의 전통을 결코 무시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예배의 형태가 아니라 주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즉 예배 드리는 사람이 예배에 임하는 내적인 마음 상태를 강조 하셨다. 다시 말하면, 장소와 방법적인 면에서의 어떤 외부적 환경이나 형식적, 습관적 자세와 같은 내적태도가 바른예배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원인과 문제이든 항상 동일한 결론은 원칙과 근본(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당연히 설득력을 더하게 된다.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신령과 진정, 온 맘(전심)과 온 몸(전신)” 배제되어 있는 예배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해답은 알았으나 실천과 적용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늘 우리 신앙생활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한데 여간 쉽사리 그 못된 버르장머리가 고쳐지질 않는다. 앞서 언급한 옛날 여인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처럼 빨래와 다듬이 방망이를 마구 두들겨 대기 보다는 차라리 실컷 두들겨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 이미 너무 더러워지고 오염되어버린 빨래감처럼 묵은 죄악의 때를 깨끗하게 벗기고 죄악의 주름를 말끔히 펼 수만 있다면 “퍽퍽퍽, 따다닥” 이라도 두들겨 맞는 것이 속 편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라도 진정한 예배자로서 거듭날 수 있다면 말이다. 좋은 의견을 제시했던 예배 사역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한 마디 더 거든다. “목사님은 밤 기도회 때와 주일예배 때에 완전 다른 사람 같아요. 밤 기도회 설교는 부드러워 너무 재밌고 좋은데 주일설교는 야단(호통)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요” 말씀의 방망이로 두들겨 맞아야(야단) 할 사람(목사자신)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후련했다.
0 Comments
Leave a Reply. |
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8월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