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에 강해하는 “은사론” 가운데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늘 하던 대로 기도회를 이어서 진행하였다.
소화불량과 배탈로 답답하고 괴로워하듯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릎을 꿇었다. 한참을 말 없이 묵상으로 기도하던 중에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시라고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어느새 아픈 내 마음을 어루 만지시는 듯 하더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만져주신 하나님의 손은 치료하시는 약손이셨다. 사전적 의미로 “아픈 곳을 만지면 낫는다고 하여 어루만져 주는 손을 이르는 말”을 약-손(藥-손)이라고 한다. “약손”하니까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소중한 이야기가 있다. 배가 아프다고 울면 어머니는 나를 무릎에 눕히시고 입으로는 찬송을 기도로 하시는 건지 기도를 찬송으로 하시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시며 여위시고 거칠어진 작은 손으로는 내 배를 어루 만져 주셨다. 그러면 아팠던 배가 거짓말 같이 낳아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 놀던 지 아니면 편안하게 잠이 들곤 했다. 아마 기억으로는 다 커서도 배만 아프면 엄마의 손을 의지해서 효과를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흔히 “엄마 손은 약손”이라는 말에 실감을 하고 동감을 하게 된다. 물론 과학적으로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자녀의 신경조직을 자극해 정서적 안정과 신체발육을 촉진한다”고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께서 배가 아프실 때도 스스로 자신의 손으로 배를 만지시며 치료행위를 하셨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참 안타까운 일이었던 것이 당시에 어머님께서는 거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셔서 오직 신앙요법(?)만 의지 할 수 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믿음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자식 된 마음에 다양한 의료혜택만 받으셨더라도 좀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셨을 분인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지금도 배가 아프면 어머니의 약손이 더욱 그리워 지곤 한다. 지금은 현대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뛰어난 각종 다양한 의약과 의술의 혜택을 받는다고 하지만 끝없이 질병과 싸워야 하는 인간의 현실은 도무지 달라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적인 어떤 노력과 시도로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말이다. 병이라는 문제의 해결과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원인을 반드시 알 필요가 있는데 관련 의학서적에서는 여러 증상에 따른 다양한 원인을 가르쳐 주고 있으나 근본 원인이 아닌 2차적인 원인일 뿐이다. 인간의 기원과 모든 역사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통해서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성경은 병의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죄의 결과(창3장)라고 해답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해결 방법(마11:28)까지 제시하므로 병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건강의학 전문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슴 과에 속하는 고라니라는 동물이 있는데 초식동물로서 아주 순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고라니가 어쩌다 집단에서 소외되면 그 반발감으로 무서운 맹수로 돌변하여 그 어느 상대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한다고 한다. 우리 사람에게도 고라니의 습성이 있어 병들고 실패하여 근심거리가 있을 때 누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소외감으로 삐뚤어진 인격이 형성되어 어디엔가 “묻지마”식의 돌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고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복음이 있다. 기쁜 소식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 28) 그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신학자 <베이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대해 이런 사람들이라고 했다. 1.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들. 2. 죄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들. 3. 삶의 문제로 마음에 걱정 근심 있는 사람들. 4. 요즘같이 삶의 현장에서 가족 부양 때문에 힘겨워하는 사람들. 5.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신앙생활에 지친 교인들. 6. 쾌락과 향락에 물들려 있는 사람들. 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짐을 맡길 곳을 찾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이다. 즉 병이 있는 줄 알지만 고쳐줄 의사를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이 상심을 넘어 비극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런 사람들을 한꺼번에 포용할 수 있을까?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변함이 없고 제한이 없는 초청은 참으로 위대한 구원의 초청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 지금은 비록 내 아픈 배를 어루 만져 주실 어머님의 약손은 멀리 기억 속에 사라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가 아픔과 슬픔으로 힘들어 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의 약손이 나를 만져 주시고 고쳐 주신다.
0 Comments
Leave a Reply. |
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August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