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선교단체의 집회가 저희 교회에서 있었다.
집회 전에 단체의 책임자로 보이는 분이 선교사님과 함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다. “목사님, 좋아하시는 음식이 뭐예요?” “저야 늘 잘 먹으니 선교사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드시죠, 선교사님 뭘 드시고 싶으세요?” “회 ~ 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답하셨다. 저는 “그래요, 그럼 여기가 좋겠군요” 하며 일식 집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자 식사를 대접한다는 집사가 급히 길을 막듯이 서둘러 말한다. “거기는 불편하니 설렁탕을 드시죠, 설렁탕 전문점이 있으니 그리로 가요” 하며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듯 말하며 앞장서 씩씩하게 걸어 간다. 나는 당황스럽고 불쾌한 마음에 “저기요, 당신께서는 그냥 가세요. 선교사님 식사 대접은 내가 하겠소” 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집회를 앞두고 있어 꾹 참으며 뒤 따라갔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설렁탕을 시켜 먹으면서 설렁탕 속에 든 고기들을 한 쪽에 골라냈다. 나의 불편한 심정을 눈치 챘는지 “어머 목사님께서는 설렁탕을 안 좋아하시나 봐요?” 나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목사가 대접을 받으면서 무슨 서운함이나 불만이 있어 불평을 하고 덩달아 장단에 맞춰 말 장난까지 하겠는가? 다만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말 장난에 놀아난 기분이 들어서이다. 처음부터 물어 볼 것도 없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인사치례나 할려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의도가 엿 보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큰 아들이 했던 이야기가 떠 오른다. “아빠, 한국사람들은 왜 약속을 장난처럼 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장난처럼 하다니?” “제임스, ‘밥 한번 먹자’ 라는 말은 많이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먹자는 말은 없어요. 그러니 그 약속은 당연히 지켜질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뭐 하자’ 말하면 나도 신경 안쓰고 그냥 그러려니 해요” 역시 자신도 모르게 속 없이, 의미없이, 예의상, 인사치례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하는 말로 습관화 되어 버린 것이다. 말의 유희도 아닌 말 장난에 불과하다. 이런 말 장난과 같은 사례가 성경에도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어떤 사건과 사물을 보고 들을 때 성경과 연관해 생각하는 것은 목사의식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예수님에게 다가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며 가증스러운 입을 맞추는 가롯유다의 역겨운 말 장난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에 예수님은 “네가 무슨 일을 행하러 왔는지 행하라” 하시는 말씀은 “쓸데없이 말 장난하지 말고 너의 불순한 의도와 목적을 드러내고 본론에 들어가라”라고 해석해도 결코 과도하거나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역시 제자들의 말 장난에 해당하는 본문이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분하여”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향유 한 옥합이라는 물질의 가치에 애착을 느낀 나머지 대단히 아까워 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속 앓이 하듯 품고 있는 생각처럼 “아이고, 차라리 나나 주지”라는 말을 흑심인 본심을 드러내 놓고 말할 수는 없고 겉으로 고상한 척 가난한 자라고 표현해야 했던 말 장난이었다. 그들의 말 장난으로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는 예수님의 책망처럼 여자에게는 상처를 주었고 그들의 속셈을 아시는 주님의 입장에서도 마음이 상하시어 불편한 심기가 되셨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향유를 붓는 마리아에게 앞장서 꾸짖는 사람이 바로 가롯유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 이어서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다는 증언이 이어지는데 유다는 예수님 일행의 전대를 맡은 자이고, 돈과 회계에 밝은 자이다. 따라서 가롯유다는 물질에 관한 한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결국 은 30에 인신매매라는 극단적 수단과 치욕적 거래로 스승 예수님을 팔아먹는 배신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결론까지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가롯유다처럼 불순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는 말 장난이 아니며 다만 무 의식속에 버릇처럼 사용했던 아무런 악의가 없는 말이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유와 변명이 어찌 되었든 본심과 진심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좋은 습관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침 주일 설교를 통해 나눈 말씀가운데 말 장난에 대한 이야기를 아들의 말을 비유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안에서 큰 아들이 입을 열었다. “아빠, 아까 설교 중에….” 하는 말에 순간 나는 얼음이 되었다. 왜냐하면 설교 중에 자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이미 수차례 경고를 받았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야기의 내용은 달랐다. “밥 먹자고 했던 사람들이 누군지도 이미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데, 교회 사람들이 많았더라구, 예배 끝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미안함을 표현하며 이번엔 진짜 밥 한번 먹자고 날짜와 장소까지 구체적으로 잡아 아빠 덕분에 공짜 밥을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고를 피했다는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오히려 아들을 위해 한건했다는 생각이 드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들과 함께 웃다가 기분이 업(UP)된 나는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큰 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들아, 아빠가 잘 했지?” 아빠의 말에 미동하지 않고 앞만 주시하던 아들 짧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앞으로 하지마!” 괜한 말 장난에 잘 올라가던 분위기만 다운(DOWN) 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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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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