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두 딸을 데리고 상담과 기도를 요청하며 따라 들어 오셨다.
모자를 쓴 따님 한 분을 가리키며 “여기 이 딸이 지금 암이 걸려 투병 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암 환자들이 착용하는 모자를 쓰셨길래 어렵지 않게 직감하던 터였다. 계속해서 어머니는 “너무 늦게 발견되어 위험하다”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말을 흐리셨다. 그런데 암에 걸렸다는 모자 쓴 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몇 년 전에 잠깐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나는 너무 바빠 예배드릴 시간이 없으나 어머니로 인해 잠시 들렸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 분임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때 교회 나온 목적이 자신의 당당함을 표출하려는 듯 자신의 의지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특별히 자신의 넓은 아량으로 시간을 배려하는 것임을 마치 알아달라는 것처럼 의미가 전달되어 기억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물론 듣기에 따라 다르다는 말처럼 나의 오도된 해석일 수도 있음을 전제한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겠다고 교회를 찾아왔다. 인간으로 오신 전능한 하나님께서 계셨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 당시 인간의 대표적 인물이 주변에 있었다. 바로 ‘베드로’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마 이 질문은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하시는 동일한 질문이 아닐까? ‘예수님 사랑’은 위대한 가능성의 뿌리이다. 그리고 ‘예수님 사랑’은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가장 뚜렷하고도 확실한 길이다. 예수님은 광대한 분이다. 예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다. 예수님은 인생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크신 분이다. 그래서 온 몸과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해 전심으로 죽도록 사랑해야 한다. 파스칼이 철학자로서 신을 탐구했을 때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병들어 어린아이같이 신 앞에 엎드릴 때 신은 나타나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사랑의 대상인가?”를 밝히려는 신학적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그저 사랑하는 일이다. 이제 기도하라. “주님! 우리의 적은 마음은 주님을 받기에 심히 부족하오니 주님을 향해 그저 나아가도록 친히 이끌어 주소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으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랑의 순종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리는 사람보다 무엇을 해줄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는 영혼을 더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주는 사랑에 탁월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려고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벽해서 “나는 아버지가 없어도 좋아요!”라고 말하는 건방진(?) 자녀보다 “나는 아버지가 참으로 필요해요!”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자녀를 훨씬 귀하게 여기신다.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고백 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믿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하나님께 헌신되는 것은 맹목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준 믿음이 원천이 되어야 한다. 인생들에게는 신뢰할만한 대상인 하나님께서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보다 ‘하나님의 인격’을 더욱 드러낸 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한 분’이다. 인생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따라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그저 평면적(이론적,형식적)으로 사랑하지 말라. 순종하는 사랑이 되도록 하라. 예수님이 그의 독생자를 주시는 무한한 희생에 의해 인생을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셨다면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일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 하나뿐인 인생의 보따리에 소중히 포개고 간직해야 할 두 가지는 ‘하나님을 향한 절개 있는 사랑’과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의 순종’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일을 감당하라. 순종은 쉽지 않다. 때때로 어려움이 찾아온다. 그러나 믿음의 시련을 잘 이겨내면 엘림의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엘림의 축복을 얻지 못하는가? 믿음의 시련에서 탈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시련은 일종의 기회가 된다. 그 기회를 잘 살리지 못하면 시련 뒤에 따라오는 하늘의 오아시스를 놓친다. 낭비되고 소비되며 허비될 수 없는 참으로 중요한 인생을 걸고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사랑의 순종을 통해 축복의 터전을 일구어야겠다. 얼마 전까지도 저희 카페를 출입하며 항상 당당하게만 보이시던 지인 한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인생 보따리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오래 전 어린 전도사 시절 어느 부흥강사의 열정적 설교가 귓전을 때린다. “성도 여러분! 서푼어치도 안되는 인생 보따리 가지고 벌벌 떨지마시고 하나님께 투자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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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8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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