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철저하게 의약분업이 되어있다.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면 약사는 그대로 약을 조제해 준다. 의사의 처방 없이 약사가 함부로 약을 조제할 수 없으나 일부 특히 한인 손님들이 임의로 약을 조제해 달라고 떼 쓰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의사와 약사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번거로움과 불편함이 있을 수 있으나 분명 정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전문성을 가진 전문가에 의해 전문적으로 취급되어야만 하고 또 그것이 서로에게 유익하고 바람직한 일임이 틀림이 없다. 지금 한국교회에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교회가 본분과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목소리가 타성은 물론 자성의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예배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를 걸고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심지어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책까지 현대 기독교를 진단하는 글과 책들이 쏟아져 나와 세인과 교인들의 관심을 끌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한 예배회복운동을 슬로건으로 수 많은 단체들도 생겨 여기 저기서 세미나와 집회를 한다는 광고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건강을 위해 의사의 바른진단은 필수조건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진단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른 처방이다. 그런데 대부분 진단 과정에서 드러나고 나타난 현상 특히 부정적인 현상에 집중해 많은 우려를 표방하는 진단을 내 놓았지 바른 구체적인 처방에 대해서는 "글쎄"라는 반응이 나와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굳이 점수를 주자면 100점 만점에 50점이다. 종이는 양면인데 한 면만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어떻게 보면 개인의 성향과 취향(부정적 시각과 편협 된 사고를 포함)에서 비롯된 면이 적지 않다는데서 오히려 우려를 자아내고 있기도하다. 그러기에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된다”는 식의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일부 같은 성향의 공감대를 이룰수는 있겠으나 다른 성향으로 부터는 공감은 고사하고 불편함과 불쾌감을 넘어 적대감마저 가지게 되어 도리어 분열 현상을 부채질하는 자극이 될 수도있다. 지난 교회 발자취를 보더라도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교회 안에 악기사용에서 부터 찬송가와 복음성가 그리고 설교자의 가운착용까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진보와 보수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인식 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낡은 주제로 더 이상 대립 각을 날카롭게 세워 대결구도를 형성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결국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고민하고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공조하고 공존할 것인 가를 고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그 동안 여러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나와 너는 분명 다르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를 이해시키기위해 너(상대방)를 설득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고 또 불 가능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자는 결론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논쟁은 본질(성경)보다는 전통과 형식과 같은 비 본질에 목숨을 걸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본질이 왜 아니냐고 목에 건강한 핏줄을 보이며 주장할 수 있으나 역시 본질을 다루는 방법에 차이 만 드러 날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목회의 옳고 그른 공과에 대해서는 장차 하나님의 보좌(심판대)앞에서 드러 날 것이므로 하나님의 소관에 맡겨 드리고 우리는 각 자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사명대로 제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교회마다 그렇게도 외치는 슬로건이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초대교회 역시 온전하거나 완전하지 않았음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볼로파도 있었고 바울파도 있었으며 동역자인 바울과 바나바와의 입장차이로 서로 다투어 나누어지는 아픔도 있지 않았던가? 누가 잘 하고 못 하고가 어디 있는가? 이것 역시 각자 사람의 성품에 따라 지지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반대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매장이라도 시킬 터이니 말이다. 잘 하자고 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고 독려하고 동참하고 협력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내가 잘 하겠다고 또 잘 하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남의 약점과 헛점 그리고 장점마저 단점으로 부각시켜 이용해 짓 밟고 넘어 가서는 안된다. 그러면 자칫 좋은 의도와 목적이라 할지라도 방법에 불순함을 이유로 튄다는 오해의 소지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그냥 조용히 묵묵히 자신의 길에 소신을 갖고 감사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 결과는 하나님께서 내가 의도하고 목적하는 바 이상으로 책임져 주실 것이다. 영향력있는 교회와 성도가 된다고하는 것은 나를 알아달라고 발버둥치는 자극적인 표현보다는 알듯 모를 듯,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이 조금 더디기는 하지만 더 오래 지속되고 깊이 파고드는 진정한 영향력이 아닐까? 오래 전 큰 아들이 어렸을때 맹장을 변비라고 진단하고 처방해 오랜시간 아이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화장실에 벌 세우듯 앉혀놓게 했던 의사의 오진은 종합병원 응급실에서야 급성맹장에 이미 맹장이 터지기 시작해 복막염이 되어 아들을 죽일 뻔 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바른 진단 을 듣고 급히 수술실로 들어 갔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 이와 유사한 일이 교인가정에서 또 발생해 다시 한번 가슴을 쓰러 내리기도 했다. 이와 같이 진단과 처방은 목숨과도 직결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며칠 후 오진한 담당의사로 부터 연락이 왔다. 의사 : 병명이 뭔가요? 환자 보호자 : !!!!!! (대답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 저 대신 후련하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출처] 진단과 처방 |작성자 NY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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