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오늘 저녁 시간되시면 식사 대접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미리 물색을 해 두었습니다. 목사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JYP가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식사도 식사지만 JYP가 운영하는 식당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졌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근처 어디에서 오픈 했다는 소리를 들어 궁금했는데 잘 됐군” 약속한 시간에 만나 일행이 들어선 식당은 유명세에 비해 겉에선 크게 눈에 띌 만한 특징이 없었으나 안에는 나름 일반 대중식당과의 차별화를 염두에 두고 신경을 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돌(?)같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않자마자 식사를 대접하는 성도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목사님과 사모님, 오늘 저녁 맛있게 편하게 드시고요. 그 동안 저희 가정과 생업을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도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런 생각이 살짝 들었다. “감사의 표시까지는 선물, 기도를 부탁하는 대목에서는 뇌물?” 이유야 기도라지만 어째든 청탁을 대가로 받는 대접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뇌물”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권을 얻을 목적으로 일정한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매수하기 위하여 돈이나 물품 따위를 제공하는 일” 하루도 빠짐없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단골 기사가 있다면 아마 “사건청탁알선”이란 부제와 함께 뇌물을 주고 받은 사람들에 관한 기사일 것이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지금까지 부패행위로 면직된 공직자들의 면직사유 1위가 “뇌물, 향응수수”라고 한다. 그만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뿌리깊은 폐단임에 틀림이 없다. 성경에도 사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주인공이 예수님의 제자 가롯유다였다.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 넘기기 위해 기득권층으로부터 은 30의 뇌물을 받았던 것이다. 구약에도 뇌물과 관련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모압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는 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이방 선지자 발람이 있었다. 성경은 뇌물을 이렇게 경고하기도 하며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또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재미난(?) 말씀도 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또한 선물과 관련된 성구도 참고로 살펴보았다.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잠 18:1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잠 19:6) 선물이 긍정적인 면에서 사람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특이한 것은 동질어로서의 선물(마탄)과 뇌물(쇼하드)을 사용하고 있다. “은밀한 선물(마탄)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쇼하드)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 21:14) 즉 선물 “마탄”과 뇌물 “쇼하드”가 동질어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지 언어 자체가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자기 목적을 위한 조건으로 상대방을 유혹하여 죽이기 위한 방법의 선물이라면 뇌물이 될 것이요, 아무런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상대방을 위하여 주는 것이라면 선물이 되는 것이다. 사실 앞서 언급한 사심이 들어 간 뇌물성 접대에 대한 표현은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였다. 선물과 뇌물의 성격을 성경적으로 한번 들여다 볼 생각으로 의도하고 접근한 글의 도입부일 뿐이다. 뇌물은 불편하지만 선물은 편안하다. 정말 편안하게 즐겁게 대접을 잘 받은 자리였다. 마치 이삭이 아들에게 축복하기 위해 별미를 요구했고 또 준비해서 야곱의 축복이 되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와 같은 기도를 청탁으로 대접하길 원한다면 기꺼이 즐거움으로 응하고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예배를 부탁하는 것만큼 자존감을 높여 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니 갑자기 하루의 피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러나 차마 집으로 바로 갈 수 없어 다시 교회로 올라갔다. 그들의 기도 부탁이 귓가에 멤돌고 마음에 걸려 발걸음을 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피차 사랑의 빚외는 지지말라 했던가? 그런데 이것도 보통 부담스러운게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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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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