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연세가 조금 지긋하신 어르신께서 운영하시는 단골 세탁소가 있다.
하루는 어르신(할머니)께서 나를 아래 위로 훑어 보시고는 불쑥 이렇게 말을 건네신다. “어제 옷을 맡기고 간 청년이 아들이 맞아요?” “아, 네 저의 큰 아들이 다녀 갔군요.” “아들이 키도 크고 인물이 참 잘 났더군요.” “아,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어째 아들이 아버지를 안 닮았어요. 개천에서 용 났네요.” “네……?” 맡긴 옷을 찾으러 온 손님을 향해 하시는 갑작스러운 어르신의 말은 마치 유행어 “거침없는 하이킥”(high kick)처럼 나를 당황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얼굴을 붉힐 일이 아님은 물론 도리어 아들의 칭찬을 위해서라면 아버지가 좀 망가지면 어떠냐? 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그런데 형제간에는 사정이 좀 다른 모양이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거실에서 엄마와 큰 아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방안에 있는 나의 귀에 들려왔다. “엄마, 어제 큰 고모네 집에 제프리(동생)하고 갔는데 고모가 “어머, 제프리가 키가 많이 컸네. 이제 형보다 더 멋있어졌어” 하며 엉덩이를 두드려 주더란 다. 계속 흥분하며 큰 아들은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자존심이 상해 못 들은 척했지만 고모가 내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말 할 수가 있어, 제프리가 나보다 더 잘 생겼단 말이야?” 하며 애써 침착한 척 말하는 것 같았으나 속내는 매우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자신은 절대 동의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엄마도 자신의 입장에 동조해 달라는 엄포성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냈다. 엄마는 서둘러 아들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주려는 듯 “아니지,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누가 뭐래도 인물은 큰 아들이 났지.” 굳이 촌수(寸數)를 따진다면 부자간(父子間) 일촌(1寸) 과 형제간(兄弟間) 이촌(2寸)의 차이 일 뿐이지만 마음의 촌수는 그보다 더 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성경에도 형제간의 사소한 편견과 시비로 불화를 겪었던 가정들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3대 사역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의외로 고향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볼품없는 출신성분과 출신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기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며 냉소적으로 폄하 하였다. “이는 나사렛 예수가 아니냐,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요1: 46)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마13: 54-58) 우리 식으로 다시 말하면 “어떻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느냐”는 핀잔과 조소이며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 꼴을 눈뜨고 봐 줄 수도 없으며 절대 인정도 더더군다나 믿을 수는 더욱 없다고 평가절하[平價切下, devaluation]하며 무시하는 말과 태도였다. 잘못되고 삐뚤어진 고정관념이 큰 오류와 실책을 범하는 동기가 되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던 동생 아벨에 대한 어리석은 형 가인의 행동. 비전의 소년 요셉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편애로 바라본 형제들의 그릇된 시각. 왕의 총애를 받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슴지 않았던 주변 동료들의 시기와 모함 등도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공통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가장 가까이에서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변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도저히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종교 지도자들과 기득권 자들의 어두운 정욕의 안목이 권력을 동원하고 민심을 조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저 없이 극단적인 도전을 하던 그들의 모습이 가슴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도 하겠지만 혹 나의 또 다른 감추어진 내면의 모습은 아닌가? 를 조심스럽게 반문하게 한다. 나는 여기서 주안에 형제,자매라 일컽는 교인들에게 한가지 묻고 싶다. 목사가 교인 중 특정인을 칭찬했을 때 다른 교인들의 반응을 알고 싶은 것이다. 반응을 평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먼저 심사가 불편하거나 불쾌하기까지 한 부정적 반응이 있고 마치 내일처럼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는 긍정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이 곳 맨하튼을 찾았을 때 교회로서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목사로서의 사역에 대한 기대는 물론 관심조차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마 못가 스스로 무너진다는 예언자적(?)인 여론이 우세하였다.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하는 섭섭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남이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내가 생각해도 주어진 여건과 환경은 그야말로 “어찌 여기서 선한 것(목회사역)이” 할 정도로 나사렛이었고 개천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직 용이라는 반응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느낄 수는 있게 되었다. 바라고 소망하기는 지금까지 걸음 걸음을 인도하시며 동행하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해 목사의 사역과 성도들의삶에 값지고 풍성한 열매를 허락하셔서 세상을 향해 이렇게 힘차게 외치고 싶다. “개천에서 용난게 아니고 원래 처음부터 용이었음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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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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