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예능프로에 출연한 어린아이에게 사회자는 이렇게 물었다.
"여자 친구있어요? 그러자 출연자 어린이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요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 예요. 나의 인생은 여자친구(?)를 만나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어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할 목적으로 꾸민 작가의 의도성 각본인지 아니면 정말 시키지 않은 말을 과장해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에는 놀랍다는 표현보다 걱정스럽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거나 모른다고도 할 수 없다. 어린 아이와 성인이 느끼는 고통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현재 교인들의 기도제목이나 소망과 같은 간절한 바램 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다른 한편에서는 작은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왜 일까? 함께 공감할 수만 있다면 고통을 반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글을 올린다. 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잠을 줄이고 취미생활을 억제해야 하는 수험생에게는 큰 고통이다. 학교에 진학만 하면 모든 게 다 해결 되리라는 부푼 꿈과 큰 기대가 있다. 그러나 학교에 진학을 하면 졸업하기까지 받는 스트레스 또한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학업의 성취는 물론 학비조달까지 당사자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졸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면 세상은 나의 품 안에 있을 것이란 기대가 크지만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비장한 각오로 전쟁터에 몸을 던지는 장수와 같은 심정으로 피 말리는 취업전선에 뛰어 들어야 한다. 취업이 되면 개선장군이 된 것처럼 회사에 출근을 하지만 곳곳에는 경쟁상대들이 먹이 감을 만난냥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그 때부터 승진은 물론 살아남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소위 총성없는 전쟁을 위해 냉혹한 암투를 벌여야만 하는 생존경쟁의 고통이 시작된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이상형의 배우자를 찾아 삼만 리가 시작이 되는데 세상에 어느 것 하나 맘대로 생각 데로 되는 것이 없다지만 천지에 보기 좋은 떡은 많아도 내 입에 맞는 떡이 없어 진통의 산고를 거듭하는 고통을 수반해야 한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결혼에 성공을 하고 가정을 이루지만 얼마 못 가 “적과의 동침” 이란 사실을 곧 알게 되어 고통스러워 한다. 어느 어르신의 말처럼 “천생연분”이 아니라 “평생원수” 라나…… 결국 인생은 마지막 종착역으로 피하거나 돌아갈 수도 없는 “죽음”이라는 문턱 앞에 이르기까지 고통은 마치 한 편의드라마처럼 계속된다. 이런 상황은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사례를 열거한 것에 불과하다. 지나친 비약과 과장된 말이라고 무시하기 보다 아니 어떤 상황에서는 오히려 축소된 면이 많다고 볼 때 어느정도 미리 알고 있으면 고통분담은 물론 대처능력을 극대화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험자에게는 이미 겪은 지난 고통이라 웃으며 말하지만 마치 스무고개와 같이 다시 반복되어지는 또 다른 고통 앞에서 힘들어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결국 소극적 측면에서 피하고 싶거나 원치 않는 일이라든지 아니면 적극적 측면에서의 바라고 원하는 일이 성취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오는 공통점은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성경에서 두 가지 원인으로 분류한다. 하나는 죄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고통으로 “징계”라는 도구이며 또 다른 하나는 “연단”이라는 도구로 의를 위해 받는 고통이다.징계이든 연단이든 축복(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수단이기에 성도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감사하므로 받으면 복이 된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바라기는 매일 밤이든 새벽이든 교회마다 성도마다 마치 연례행사의 일환으로 “특새”(특별 새벽기도회)니 하는 이름으로 작정 기도회를 하고 있다.(울 교회는 “특밤”이라 해야 하나) 기도시간을 위해 잠을 줄여야 한다든지 음식과 취미생활의 절제 그리고 자유시간 제약에 따른 개인의 다양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간절한 기도를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 팔이 저리도록 두 손을 높이 드는 행위와 목이 터져라 소리 높여 부르짖는 기도, 교회와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에 뜨거운 눈물로 바닥을 적시며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꿇어 쥐가 난 발을 주물러가며 기도하는 모습 등도 나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작은 고난이라고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 주님의 고난은 부활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지금 우리의 작은 고난 역시 약속 성취를 위한 축복의 전주곡이며 예고편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큰소리로 묻고싶다. 전주곡이나 예고편 긴 것 본 사람 어디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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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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