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기사에 나오는 사건사고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겠지만 요즘에는 남의 일같지 않게 여겨진다.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한인사회에 여러가지 안타까운 소식들이 경제불황의 여파로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던차에 어제도 한 어린 유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다름아닌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내 주변에서 일어난 사고였기에 안타까움을 더했다. 사고이후 주변인물들의 반응을 들어보았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평소에 더 잘해 주었을텐데…”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지인. “성격이 활달해서 자살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믿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태권도학원을 다니는 등 활발한 과외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렇게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나는 죽을 때 목메달아 자살할꺼야” 물론 장난으로 하는 이야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말까지 덧 붙여서 말이다. 자살동기에 대해 이말 저말이 많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최근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죽기 전에 어느 정도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아무튼 죽은 자는 말이없다고 본인외에 누가 그 속마음을 알겠는가만은 분명 잘못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가뜩이나 한국 유명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소동이 연일 메스컴을 달구고 있던터라 이런 악영향이 한참 예민한 어린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원인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해보게 된다. 물론 사자(死者)를 두고 시시비비[是是非非] 나 가리자고 하는 의도도 없다. 다만 주위에 이와 유사한 환경에 있을 어린 학생들이 많다는 생각에 이와같은 어리석음이 다시는 반복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다. 나는 이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다가 다른 한쪽의 기사에 눈이 갔다. “김연아, 1년에 엉덩방아 1000번도 넘어요”라는 타이틀의 기사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피겨요정 김연아(19세)는 휴일을 빼고 한 해 300일 가량 훈련한다. 빙판에서 하루 30여회 점프훈련을 하니까 1년이면 9000회 가량 점프를 하는 셈이다. 점프의 성공률이 80%선이므로 1년에 점프하다 넘어지거나 엉덩방아를 찧는 횟수가 1800번 정도된다는 얘기다.” 연습은 물론 실전에서 고난도의 점프를 시도하다가 실패하면 본인은 물론 팬들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탄식이 저절로 나오기도하지만 성공하면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마련인 것처럼 오늘의 국민요정 김연아가 있기까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온 몸의 부상을 무릎쓴 투혼이 있었다는 이야기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언어와 문화의 소통이 원할한 단일민족이 사는 조국에서도 살아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련만 언어와 문화의 소통의 불편함은 물론 때론 인종차별도 감내해야하는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는 다민족 사회인 이민사회에서의 삶은 어린 학생이든 성인이든 힘들기는 다 마찬가지임이 틀림없다. 누구나 미국에 온 목적은 조국에서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와 꿈을 안고 머나 먼 태평양을 건너온다는것이 동일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한국서보다 몇 배 더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하지 않고서야 되겠는가? 힘든 과정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목표달성을 위해 현재의 어려움을 발판삼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나는 김연아의 기사를 가위로 오려 스크랩을 하였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들이 “아빠, 무엇을 또 스크랩해요? 설교때 쓰려구요?” 나는 잘되었다 싶어 아들과 같은 나이 또래의 자실한 여학생과 김연아의 이야기를 비교하며 훈계[訓戒] 하기시작했다. “아빠, 아~ 알았어요. 나도 설교시간에 들을께요.”
0 Comments
Leave a Reply. |
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August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