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은 현대인들에게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못한 미국생활은 더욱 그렇다. “차는 곧 발이다” 라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도 운전석에 안 앉아 본 날이 있을까? 할 정도로 아니 하루에도 수 차례 앉는 자리가 바로 운전석인 것이다. 그만큼 생활에 밀접한 관계를 차지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목사로서 말씀의 자리와 기도에 자리에 앉는 것 못지않게 많은 운전자의 자리가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말이 바른 적용인지는 모르겠으나 강단에서는 거룩한 목사로서 손색(?)이 없는데 반해 운전석에서는 폭군(?)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감추어진 성질과 기질이 다 나온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오래 전 어느 선배 목사님의 말이 새삼 생각이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목사가 운전할 때는 교인들을 태우지 말든지 아니면 운전을 하지 마세요” 아마도 깊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었으리라. 몇 일 전에도 아내와 누이 권사를 차에 태우고 운전을 하던 중에 급한 성미를 감추지 못하자 누이 권사님의 한마디 “성질 좀 죽여, 왜 그리도 급해!” 가족이라 편하게 생각하고 행동한 일이 이내 부끄러움이 될 줄이야. 민망함을 애써 감추려고 애꿋은 찬양CD 보름을 크게 올렸다. 운전을 배울 때는 물론 초보운전자 때도 운전석은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대단한 자리였다. 어쩌다 조수석이라도 앉게 되면 운전석에 앉아 여유 있게 운전하는 운전자가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운전석에 앉는 기회가 주어지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착석한 후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오늘도 무사히를 겸허한 마음과 공손한 자세로 기도한다. 처음 교회를 개척해서 교인이 조금씩 늘어나자 교회밴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재정형편상 차량을 구입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어느 목사님의 예화가 생각이 났다. 한 소년이 기타를 갖고 싶어 기도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작은 삐꾸(Pick)를 준비해서 이렇게 기도를 했단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삐꾸 (Pick) 는 있는데 이 삐꾸를 사용할 기타가 없어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자고 일어나 방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기타를 갖다 놓았다는 간증이었다. 받은 은혜는 깨달은 데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믿음의 자세라는 생각에 나도 먼저 면허증을 준비하고 기도하면 차는 하나님이 알아서 준비해 주시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정말 놀랍게도 한 소년의 간증은 곧 나의 간증이 되는 증거가 되었다. 비록 새 차는 아니지만 어느 분이 쓰던 봉고차를 교회에 기증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운전석의 주인이 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운전석에 앉는 감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집안에서 차가 잘 있나 창문너머로 보다가는 어느새 운전석에 들어 가 앉아 핸들을 이리저리 쓰다듬고 먼지가 묻을 새라 닦아내기를 매일같이 반복한다. 그러면서 선뜻 엔진을 켜서 운전을 시도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깊은 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심야시간을 이용해서 운전연습을 하다 경찰 순찰차에 의해 검색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도 낡은 차가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당시에 유행하던 범죄 인신매매 차량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운전석에 앉을 때는 이 때를 기억하여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동안 많은 경험과 경력이 붙었다 하여 대단히 건방지고 교만해진 모양이다. “목사님은 운전석에만 앉으시면 온유함이 없어져요” 어느 교인의 충격적인 직격탄이다. 그렇다고 운전을 안 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운전석은 나를 훈련시키는 자리인가보다. 성질과 기질을 죽이고 온유함을 회복해야겠다. 그리고 상황과 자리에 상관없이 항상 목사로서의 품위(?)를 잃지 말아야 겠다고 애써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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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Augus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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