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라디오 생방송 중에 방송사고가 날 뻔 한일이 있었다.
전화를 주신 어느 애청자께서 신청 곡과 함께 기도제목을 부탁 드리시고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방송으로 늘 목사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분이실까를 궁금하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특히 문화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이라고 하시니 아무래도 예술인같이 생기셨을 거라는 상상이 들어요.” 그러자 그 말을 받아 함께 진행하던 아나운서께서 “맞아요, 잘 상상하셨어요.” 라고 말을 이어갔다. 그때 나는 이런 엉뚱한 대답을 했다. “저는 계속 신비주의로 가겠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스튜디오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더욱이 함께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생방송 중에 실수할까 싶어 뒤로 넘어가는 웃음을 참다가 오히려 방송사고가 날 뻔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의 용어가 아니고 요즘 연예계 톱스타들이 자신의 인기관리차원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즉 “신비주의” 컨셉을 통해 팬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고 증폭시키는 일종의 심리전략인 셈이다. 방송을 마치고도 계속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에 지쳐있던 피곤도 잊은 채 아나운서들마다 그 동안 자신들의 경험담을 늘어 놓으며 모처럼 큰 웃음들을 주고받게 되었다. 방송국을 나와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호주 시드니에서의 일을 떠 올렸다. 세계 3대 미항이라 불리는 시드니에는 명물 오페라 하우스를 따라 돌아가며 해변을 감상할 수 있는 워킹코스가 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환타스틱을 연호하며 감탄할 만큼 아름다움 그 자체였기에 한국에서 손님이 오시면 꼭 소개하는 관광코스이기도 하다. 한번은 손님을 모시고 해변을 따라 함께 걸어가다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급 당황하게 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눈 앞에 펼쳐진 갑작스러운 광경이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 곳은 한 마디로 에덴동산이었다. 우리 일행외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나신[裸身 nude]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옷을 입고 있는 정상적인 우리들은 부끄러워 몸둘바는 물론 시선조차 어디둘지 몰라 어색한 반면에 벌거벗은 저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우리일행을 불청객 대하듯 이상한 눈으로 훑어 보는 것이었다. 꼭 이런말이 생각나는 상황이었다. “두 눈 가진 원숭이가 한 눈 가진 원숭이 마을에 들어 갔더니 모두들 병신왔다고 놀려댔다나….” 잠시 후 그들 중 한 사람이 물론 벌거벗은 몸으로 성큼성큼 우리 앞으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닌가! 나신의 모습이 가까워 오면 올수록 눈동자의 촛점은 줌인과 줌아웃을 바쁘게 반복하고 있었다. 이윽고 더이상의 작동이 불가능한 거리에 도달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옷을 벗지 않으려면 이 구역에서 나가야만 한다” 뭘 망설이겠는가? 옷을 벗을 용기가 없는 우리는 민망히 도망치듯 누드비치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일행중 한명이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멀리서나마 조금 더 구경하고 가자고 제안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의 큰 바위위에 올라가 말로만 듣던 누드비치를 자유롭게 감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슴의 박동소리를 느끼며 흥미롭게 구경하던 처음감정 즉 호기심과 기대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저 눈 앞에 고기덩어리들이 왔다갔다 한다는 생각이 드니 도리어 흉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감정의 반전이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신비주의”가 사라진 것이다. 신앙생활에도 “신비주의”라는 말이 있다. 나타나는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지나치게 집착하여 본질을 잃어버리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 할 수있기에 경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는 호기심이나 자극하고 유발 시키는 “신비주의” 수준이 아니라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비” 그 자체이다. 사무엘상 6장 19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라는 말씀에서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또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이러한 신비주의의 악영향이란 생각도 든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하나님을 힘써 알려는 노력과 추구는 성경에서도 강조하는 바이지만 하나님이 나타내신 즉 계시[啓示, revelation]된 범위와 영역을 벗어나서는 결코 않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사람들의 포장에 불과한 신비주의는 결국 실망 뿐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신비는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 새롭고 귀해 더욱 우리를 놀라게할 것이다. [출처] 신비주의[mysticism]|작성자 NY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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