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목사회는 1월 12일(월) 청교도들이 미국에 처음 도착한 지역인 플리머스를 방문하여 “청교도 신앙으로 돌아가자” 라는 주제로 신년 기도회를 가졌다.
미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고 오랫동안 미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청교도 정신과 신앙이 지금은 퇴색되어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해이해지고 타락한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기에 “청교도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기도회는 나로 하여금 어린아이가 소풍을 가는 것처럼 가슴 설레게 만들었다. 오전 5시30분 새벽기도회를 시작으로 간단히 조찬을 나눈 일행들은 두 대의 버스로 나누어 타고 드디어 청교도가 처음 미국에 도착한 프리머스를 향해 출발했다. 목적지인 플리머스는 보스턴 남쪽 약 40마일 지점에 위치한 인구 5만의 작은 도시이다. 뉴욕에서 약 5시간 정도 소요되는 장거리인지라 자칫 지루할 수 있겠으나 동승한 목사님들은 여기저기서 평소 나누지 못한 이야기 보따리들을 쏟아놓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물론 어떤 목사님들은 아예 그 동안의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 작정으로 오신 듯 자리에 앉자마자 잠을 청하는 모습도 눈에 띠었다. 어느덧 도착한 플리머스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멀리서 보면 언뜻 자유의 여신상과 비슷해 보이는 25미터의 거대한 동상이 항구를 내려다 보고 있는 "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이다. 동상 아래 작은 조형에는 청교도의 정신을 나타내는 글과 미국에 도착한 102명 청교도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동상 주위에 모인 일행들은 기도대형으로 손을 잡고 둘러섰다.목사회 회장 목사님이 나와서 기도회를 인도하시기 위해 입을 여셨다. “여러분 참 놀라운 것은 오늘 뉴욕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목회자와 기자단)의 숫자가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 숫자102명과 똑 같습니다.”라며 흥분과 감격을 감추지 못하며 말문을 이어가셨다. “이제 우리 두손들고 주여 3창하신 후 미국이 청교도정신과 신앙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갑자기 조용한 시골 마을에 천지진동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합심기도 후에 93세의 원로목사님의 우렁찬 마무리 기도가 있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일행은 아직 눈과 얼음이 해동이 되지 않은 채 얼어붙은 언덕진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었다. 일행 중 그래도 젊다고 생각한 나는 자신 있게 앞장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가 발생했다.나는 뚜벅뚜벅 힘차게 내려오다 제대로 된 빙판을 만난 것이다. “미끌”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어…… 어……어……”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온 몸에 힘을 주고 발버둥을 치는 꼴이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키게 된 가운데 영화 “나 홀로 집에”의 한 장면처럼 그만 엉덩방아를 찌며 그대로 맥없이 뒤로 나 자빠지는 굴욕(?)을 맛 보아야 했다. 눈을 베게 삼아 쭉 뻗은(드러누운) 나는 오랜만에 높고 푸르른 겨울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일어나기 싫었다는 것이다. 주위사람들의 괜찮으냐? 는 말에 “정장을 입어 구두를 신고 왔더니 많이 미끄럽네요."라며 에둘러 변명을 했지만 사실은 나뿐 아니라 그날 일행 모두 정장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문 지는 "플리머스 락(Plymouth Rock)"이다. 이곳은 청교도들이 처음 미국땅을 밟은 곳으로 이를 기념하여 돌에는 처음 도착한 연도인 "1620"을 새겨놓았다. 아쉬운 것은 바로 앞에 정박해 있던 메이 플라워호[Mayflower-號]를 볼 수 없었었는데 관광 비수기인 겨울에는 보존 차원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물론 이 곳에서도 어김없이 “주여 3창”과 함께 두 손들고 통성기도가 이어졌다. 가는 곳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을 뒤집어 놓았다.그러나 감사한 것은 단체가 이동하며 소리 내어 찬송하며 기도하고 또 기자단들의 의해 기념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촬영하느라 다소 어수선한 소란을 피워 그 곳 경찰관과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지만 그들은 제지나 아무런 불평 없이 오히려 협조하는 분위기였다. 이어서 일행은 프리머스의 주요지역을 방문한 후 미국교회인 필 그림교회(The chuch of Pilgrimage)을 방문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담임 목사님의 교회소개와 더불어 세미나를 통해 더욱 청교도의 신앙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수기인 관계로 더 많은 기념이 될 만한 시설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우리 일행은 뉴욕을 향해 출발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의 시간은 주최측이 준비한 리크레이션과 부족했던 청교도 세미나를 반복하며 진행하여 더욱 알찬 시간을 갖게 되었다. 특히 우리 일행이 탄 버스에는 초대가수도 있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노래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아 한때 인기 스타였던 가수 이 영화집사의 공연 또한 즐거움을 더했다. 한 때나마 인기인이었던 그가 이제는 관광버스 가수가 되었는데도 이렇게 말 하는 것이다. “전에 인기인었을 때는 여러 번 미국을 방문하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다가 이렇게 찬양하는 가수가 되어 미국을 방문하고 더욱이 많은 목사님들과 함께 여행을 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영광이고 감사할 뿐이지요.” 역시 하나님의 은혜는 참 좋은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이어서 역시 입담으로 소문난 회장 목사님의 능청스럽고 맛깔 나는 진행으로 노래자랑대회가 이어지고 있었다. 먼저 메들리로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구수한 목소리로 선창하시고 첫 번째 출연자를 모시겠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느닷없이 어떤 분의 추천의 의해 사회자가 나를 호명하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것이다. 절대 빼는 일이 없는 나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내심 준비하고 있던 차에 불러주니 오히려 고맙지 않은가. 군 시절부터 나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노래가 있다. 데뷔 곡도 없는 대표 곡으로서 기회 있으면 부르는 곡이 되었다. “아침이슬”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 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노래를 열창하고 자리에 돌아와 나는 미국의 청교도 신앙 못지않게 믿음 지키며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셨던 나의 믿음 조상 할머니를 생각하게 되었다. 100년 전 어느 양반 집에 시집을 가신 후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그리스도인이 되신 며느리에게 하루는 시아버지께서 부르시고 노발대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오늘 시집을 택하든지 서양귀신을 택하든지 하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서양귀신(예수)을 택하시고 시집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신 할머니는 그 후로 과부 아닌 과부로 평생을 사시며 아들 과 딸을 주의 종인 목사와 전도사로 세우시고 1967년 84세를 일기로 건강하게 사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로도 청교도 정신과 신앙으로 무장하셨던 할머니의 믿음을 계승한 후손들은 많은 주의 종을 배출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 행사로 청교도 102인을 기념하여 세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의 기도회 모임은 시간 관계상 취소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적지 않은 아쉬움이었다. 빌딩 바로 옆에 섬기는 교회가 있었기에 내심 많은 목사님들에게 더불어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아쉬움을 한 채 청교도의 성지순례를 위한 행사는 마무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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