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미국이나 서구의 방송문화에서는 개인이나 단체생활의 사실감과 현실감을 반영해 많은 시청자들의 흥미와 인기를 얻었던 리얼리티(Reality)를 추구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도 봇물 터지듯 앞다투어 방송국마다 이 리얼리티라는 이름 하에 다양한 포맷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작가의 의도와 목적에 의해 특정인이 설정되고 스토리가 구성되며 캐릭터를 억지 짜 맞추기 식으로 만들어가는 인위적인 연출 프로에 식상한 대중들에게는 실제 현장을 바탕으로 사실감과 현실감을 갖게 함과 동시에 꾸밈이 없는 출연진들의 진솔한 모습은 물론 심지어 망가지는 모습 등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하며 또는 호기심에 대한 자극과 충족으로 흥미를 더하게 하는 요인이라 하겠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 또한 순수 100% 리얼리티라고 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구성에 따른 작가의 대본과 PD의 연출에 의해 목적과 방향은 설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따른 다양한 문제점 역시 제시되고 있다. 대중의 엿보기 식 관음성에 따른 사생활 침해라든지 윤리성을 벗어난 대리만족, 사실성을 강조하지만 또 다른 허구성에 따른 도덕적 가치상실, 상업적 이윤추구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빼기기식 모방 포맷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프로그램들은 대체적으로 시청률을 끌어 올리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이러한 리얼리티 문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리를 향한 목마름과 같은 본능이 있다고 본다. 태초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하에 창조되고 조성된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고 살게 되어있다. 즉 진리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다는 말이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과 생기에 의해 지은 바 된 인간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누구나 그 길을 찾고자 원하지만 알지 못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방황하고 있거나 잘못된 비 진리를 붙잡고 목숨을 거는 세인들의 어리석은 모습은 물론 심지어 광야에서 우상인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우겨대며 광란을 벌이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에서 혹시 오늘 진리와 비 진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아니면 온갖 종교적 색채를 띄고 진리인척 외식의 가면으로 위장해 보지만 실은 회 칠한 무덤과 같은 현대의 또 다른 바리새인들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리얼리티 신앙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따라서 산 제사요 산 제물이 되는 살아있는 예배요 예배자가 되어야만 한다. 우선 산 제사에 대한 정의를 예수님은 우물가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올 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장소, 형식, 틀에 매이지 않고 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일컬어서 산 제사라고 말씀하셨다. 이 산 제사라는 개념은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 즉 선데이 크리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의 예수님께서 사는 생활을 일컫는 말이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예수님이 나를 통제하고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시고 내 안에 생명으로 나타나는 삶을 일컬어서 산 제사라고 한다. 또한 산 제사는 율법적인 삶과는 다르다. 율법적인 삶은 규범을 정해놓고 그 규범에 따라야만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규범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 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 제사의 삶은 규범에 얽매인 삶이 아니고 규범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거나 규범 때문에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매 순간 순간마다 나를 통제해서 그 분에 의해 자유롭고 편안하게 나타나는 삶을 말한다. 지금 세상은 교회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또한 타락한 세상의 유일한 대안이자 소망인 교회에 거는 바램과 기대도 있다. 바로 살아있는 진실한 신앙 그 자체를 보기 원한다. 조금은 어설프고 때로는 실수가 있어도 리얼리티에서는 용서가 되는 것은 어차피 완전하거나 완벽한 것을 바랄 수도 없고 바라지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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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In His Plan, In His Place, In His TIme! Archives
8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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