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 문턱에서 지난 여름 수양회 기간 중 발생했던 한 사건을 그냥 지나치기 보다는 교훈이 될까 싶어 글로나마 남기려고 한다.
전 교인이 참여하는 순서로 기대를 모았던 카약 또는 레프팅이라는 재미있는 레크리에이션을 하고 왔다. 지난 해에 이어 두 번째라 어느 정도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지고 여유 있게 노를 저어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를 비롯 온 교우가 단체로 목적지를 한참을 벗어나는 위급하고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아무래도 책임자인 나로서는 더욱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대서양 앞바다에서 표류하게 될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호호, 하하” 신나게 물길과 바람에 몸을 맡기며 노를 저어 내려오던 또 다른 일행들과 결국 큰 호숫가에 단체로 갇히게 되었는데 여기서 두 가지 사안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계속 가보자는 의견과 아무래도 목적지를 벗어난 것 같으니 되 돌아 올라가자는 의견이었다. 최종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나는 돌아가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행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되 돌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미 어떤 팀은 시야에서 벗어나 전력질주로 돌아가고 있었고 다른 팀들도 아주 진지한 표정과 결연한 자세로 말없이 노를 저어대고 있었다. 내려올 때와 달리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뿐 아니라 이미 힘을 소진해 지쳐있었고 또한 왠지 모를 두려움에 겁을 잔뜩 먹고 있던 그들의 표정을 보았는지라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나왔는지 그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되 돌아 가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장애물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위험한 늪을 비롯 부러진 채 물길을 가로 막고 있었던 통나무들 등을 마치 유격 훈련이라도 하듯이 그 모든 장애물들을 제치고 벗어났던 것이다. 이윽고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고 먼저 도착한 보트에서 부랴부랴 내리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서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의 웃음이나 환호 역시 없었다. 즉 있는 그대로의 그들의 모습에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말은 안 했지만 한 마디로 “죽을 뻔 했네” 였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오죽 했겠는가? 역시 한 마디로 슬펐다. 애써 태연한 척 목적지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린 나는 분위기 반전을 위해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고생은 했지만 오히려 스릴이 있어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나의 이 말에 신빙성을 갖고 반응하지 않아 메아리로 내 귀에 돌아올 뿐이었다 이 후로 나와 교우들은 몇 날 몇 일 동안 문제의 원인 분석을 하느라 분주했다. 심지어 수양회를 다녀와서 인터넷으로 방황의 흔적을 찾아 마치 성지순례지도 보는 것 같은 지도를 만들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충격이 심하긴 심했던 모양이다. 어째든 내가 내린 방황의 이유는 이렇다. 첫째. 지리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지난 해에 이미 경험하여 잘 아는 코스이기에 조금 만 더 가면 곧 익숙한 코스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해 코스와 여기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장소였다. 둘째, 배를 대여해 주는 관계자들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즉 3시간 코스인데 우리는 2시간도 안되어 이미 목적지를 지나쳐 버렸다. 작년 경험에 의하면 2시간 코스인데도 무려 3시간 이상을 고생하며 내려왔으므로 적어도 네, 다섯 시간은 족히 걸려 내려 올 줄 알았다. 따라서 1시간 정도 지나면 작년에 경험했던 난 코스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으니 계속 진군 앞으로를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배를 올려 놓고 여유를 부리던 전도사님 부부도 이런 목사의 명령에 다시 배를 끌어 내려 어부지리로 따라 나섰다가 덩달아 생고생을 하였던 것이다. 셋째, 리더의 잘못된 판단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또 다른 전도사는 내려갔다가 아닌 것 같아서 다시 올라오고를 무려 3번 이상 반복하다가 다시 나와 부딪혔다. 그때도 나는 단호하게 외쳤다. “계속 앞으로” 라고, 아직 시간 계산상, 지리적 경험상 더 내려 가야 한다는 잘못된 확신이 가져다 준 오판이었다. 이 모든 원인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지와 무식에서 비롯 된 용감한 착각이 만들어 낸 위험한 방황이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세월을 방황했음을 상기해 본다. 방황은 죄의 대가요 산물이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코 방황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과요 목적이 아닌 것이다. 다만 어리석은 불순종으로 얻은 결과로서의 방황이긴 하지만 그 기간에도 하나님께서는 훈련과 연단이라는 과정을 통해 백성들을 인도하신다. 나는 애써 이렇게 변명을 하고 교인들에게 슬며시 책임을 일부 전가해 보았다. “목사가 말해도 여러분의 주장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밝히고 말렸어야지, 혹시 다음에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면 어떻게 할래요?” “바보죠” 누군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듯 작게 말한 소리가 내게는 왠지 크게 들렸다. 이 일로 인해 나는 교인들을 향해 두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교인들을 바보로 만들어 고생을 시켜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어찌했든 목사의 말에 바보같이 끝까지 따라 주었던 교인들이 너무 고마웠다. 아무튼 이제 우리의 삶의 여정에 방황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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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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